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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inite Tolerance

한없는 관용

August 30, 2019 - October 02, 2019


			
 갤러리바톤은 고산금 (Koh San Keum, b. 1966)의 개인전, 한없는 관용(Infinite Tolerance)을 2019년 8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개최한다.

 고산금에게 텍스트는 이미지이다. 마치 화가가 특정한 사물의 외양에서 불현듯 영감에 휩싸이듯이, 작가는 자신이 몸소 읽고 사유의 근거로 삼던 책과 문장에 매료되는 시점에 반응한다. 오랜 해외 생활을 거치며 단련된 절제된 생활 방식과 다양한 문화권에서 부지불식 수용한 고유한 양식들이 구축한 작가 특유의 취향은, 특정한 창작물과 문체에만 호의적인 고산금만의 지적 수용체를 형성하였다. 다시 말해, 유독 작가가 선별적으로 감응하고 매개하는 문장과 그것들의 군집은 고산금이라는 한 작가의 고유한 정체성과도 같고, 작가주의의 요체이기도 하다.

소설, 신문, 시, 철학서, 법전 등 사회적 기호로서 소비되는 텍스트를 물질적 오브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글자의 수와 글자들 사이의 간격을 기준으로 4mm의 인공 진주가 정격적이고 미니멀한 배열로 자리 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문장의 의미론적 맥락이 감춰지게 되며 작가의 예술적 상상력과 에너지, 글자들이 만들어 내는 시각적 조형성과 심미성이 부각된다. 이러한 과정은 수 만개의 인공 진주를 작가가 일일이 손수 패널 위에 배치하는 강도 높은 수공의 과정을 통해 진행되는데, 진주 구슬로 옮겨진 텍스트는 기호로서의 기능적 역할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며 탈 국가적 탈 민족적 상태로 승화된다. 특히, 이러한 고된 수행은 해석력을 담보로 한 텍스트 본연의 권력을 해체하고 오직 보편적인 인간의 시각에 반응하는 중립적이고 한없이 관용(Infinite Tolerance)적인 일종의 새로운 차원의 언어로 재탄생 시키겠다는 작가의 결기에 의해 추동된다.

기존의 진주 작업이 수십 번의 반복적인 칠 공정으로 상아의 표면과 흡사한 패널에 이식됨으로써 텍스트의 원전에 대한 작가의 경외감을 은유하였다면,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시리즈는 셀 수 없이 빼곡한 볼펜의 궤적 위에 기거하는 인공 진주의 군집으로 나타나며 작가의 관심사가 텍스트의 탄생 이전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수십 개의 검은색 볼펜이 만들어낸 화면은 선과 선이 겹쳐진 정도에 따른 미세한 패임 등의 흔적을 가지고 있고, 그 흔적마다 자연스럽게 인공 진주의 군락이 형성돼 있다. 이러한 군락은 이전 작업에서 보이던 정격적 배열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이며, 마치 현미경으로 확대된 유기물의 형태와 유사한 무작위적인 패턴과 얼개로 특정된다. 이러한 구도와 효과는 일종의 원시성을 드러내며, 텍스트 이전의 세계, 즉 텍스트가 활자화되기 전 문장가의 마음속에 심상으로만 존재하며 서로 엉켜서 무언가가 되기 직전인 듯한 화면을 연출한다. 진주 패널 작품의 프리퀄(prequel)로 해석될 수 있는 신작을 통해 고산금은 '텍스트 이전의 텍스트'라는 광활하고 전인미답의 영역에 대한 자신의 탐구와 해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고산금은 이화여자대학교 회화과와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2016년 갤러리바톤 개인전을 포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등 국내 주요 미술관 및 북경 C5 아트 베이징(C5 Art Beijing), 로마 카를로 빌로티 뮤지엄(Museo Carlo Bilotti, Italy) 등 해외 유수의 미술 기관에서도 활발한 전시를 이어왔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경기창작센터, 서울대학교 미술관 등에 소장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