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용: Trunk I 68m2
갤러리바톤은 이진용 작가의 개인전 《Trunk I 68 m2》를 4월 15일부터 5월 24일까지 압구정동 전시공간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본격적으로 페인팅에 몰두하면서 집중해온 대상들, 즉 가방과 책에 대한 다양하면서도 심도깊은 회화적 변주의 정수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됨과 동시에 사실주의에 대한 작가의 독창적 접근 방식과 해석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26점의 페인팅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회화 연작 〈Trunk Series〉인데, 작가의 내밀한 의식 영역에서만 존재하던 가방 이미지가 구현된 수십개의 캔버스가 전시장의 대형 벽면(68 m2)에 빈틈없이 설치된다. 벽면을 따라 촘촘히 묘사된 각 가방 이미지의 독립된 리얼리티간 상호 작용이 이미지간 단순한 횡적인 연대를 넘어서 무수히 많은 가방의 ‘valley’를 무의식적으로 연상시킴으로 인해 종국에는 ‘경탄’의 단계로 이끌게 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고도의 회화적 설치작이다.
일견 극사실주의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 제작방식에 대한 지식과 묘사하는 이미지의 근원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작가는 대단한 수집광이기도 한데 동서양의 오래된 책, 가방, 악기, 카메라, 타자기부터 보이차, 침향, 화석 등 시대를 지나오면서 그 가치와 풍미가 배가되온 수만점의 물건을 수집해오고 있다. 특히, 정신과 물질을 담는 용기이자 전달 매체인 책과 가방이 주는 아름다움, 그 안에 켜켜히 쌓인 역사와 그 속에 배어있는 장인정신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에 작가는 특히 매료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작가로 하여금 작품의 소재로서의 가방과 책에 주목하도록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점 중 하나는 그의 모든 작품이 실제 모델을 기반으로 것이 아니라 오롯이 그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수십년간 수많은 책과 가방, 그리고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관계와 가치, 시간들을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여 온 기억들과 영상, 물리적 감촉에 대한 시각화가 오랜시간 축적되면서 ‘실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회화적 구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려냄으로써 외양의 기계적인 묘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이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무수히 연마해온 예술적 기교를 온전히 사물의 본질, 즉 보편적이고 영원불변한 원형질의 구현이라는 작가적 이상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회화적 접근 방식은 묘사된 책과 가방의 이미지들을 단순히 바니타스적인 무작위 결합의 산물이 아닌 사물의 본질에 대한 한 화가의 극단적인 추구의 결과로 승화시키는 촉매제라고 할 수 있다.
가방과 책의 외형 그 너머 어딘가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극한의 탐구와 절제된 고도의 예술적 테크닉의 이상적인 결합을 보여줄, 사실주의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작가의 본질주의적(Essentialism) 접근의 오늘을 살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오랫동안 작가의 전시를 고대하던 국내외 미술애호가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