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방식들: 정치영, 김동유, 피터 스틱버리, 신디 라이트, 윤석원
갤러리바톤은 5월 27일부터 6월 27일까지 국내외 작가 다섯 명의 주목받는 작품들을 선보이는 《기록의 방식들(Ways of Recording)》전을 개최한다.
정치영(Chung Chi Yung, b. 1972, Korea), 김동유(Kim Dong Yoo, b. 1965, Korea), 피터 스틱버리(Peter Stichbury, b. 1969, New Zealand), 신디 라이트(Cindy Wright, b. 1972, Belgium), 윤석원(Yun Suk One, b. 1983, Korea)이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작가 고유의 사유와 관찰을 기록하는 매개로서의 회화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모색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기능적으로 볼 때 사진의 등장은 회화의 주된 영역 중 하나였던 ‘기록’ 매체로서의 기능을 상당히 대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각적 측면에서 ‘기록’이라는 행위는 대상에 대한 재현의 정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과정의 상당 부분에 기계(카메라, 인화기 등)가 개입하여 피사체의 물리적 자취를 최대한 담아내는 사진이 이런 점에서 훨씬 유리하고 선호되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수잔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의 지적처럼 이는 곧 회화를 정확한 재현이라는 지루한 고역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궁극적으로 추상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특히, 재현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작가의 상상력과 주관적인 해석 및 테크닉의 개입 여지는 증가하였고, 구상화의 최종 결과물은 어떤 면에서 작가 자신에게는 주관적 기억과 당시의 상황, 묘사된 대상에 대해 품은 개인적 사유가 충만한, 사적인 아카이브이자 기록이 된다.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 1950-1990)가 말했듯이 무엇인가를 재현한다는 것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일종의 권력 행위이다.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과 주어진 환경에서의 심상의 결정체가 시지각에 반응하는 회화로 재탄생될 때, 우리는 그 이미지를 해석하려 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지점에 놓이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실주의 회화의 최종 결과물은 어떤 형태로든 작가와 연결되어 있는 기록의 산물이다. 사진과 대비되는 불완전하고 비정형적 요소가 역설적으로 시적이고 미적인 표현의 충만을 가능케 하기에, 실행된 권력은 더욱 빛을 발하는지도 모른다.
포토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정치영의 〈The Age of Quarrel 5〉(2015)은 사진의 형태로 매스미디어를 통해 반복 재생산되고 소비된 이미지의 재현에서 출발한다. 사진 이미지상 암부의 계조(Gradation)를 넓은 스펙트럼의 중간색을 사용하여 재구축하는 방식의 작업을 통해 회화적 감성이 충만한 결과물을 재현해 낸다. 원래 이미지에 일종의 파스텔톤 막이 정교하고 균질하게 도포된듯한 효과는 한때 열광하였고 주목했던 사건과 행위가 과거의 지나간 일이고 다시 올 수 없는 순간임을 내포하는, 노스탤지아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김동유의 나비 우표 시리즈 〈Republic of Korea〉(1993)는 줄곧 팝아트적 접근법을 견지해온 작가의 초기작이자 더블 이미지 및 최근의 나비 시리즈의 시초가 되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즉물적인 표현법이 번득이는 이 시리즈는 실제 발행되고 판매 유통되었던 우표를 기초로 제작되었다. 하나의 도구로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개입되어 원래 이미지가 가진 고유한 느낌이 사라져 버린 대상을 차용하면서, 구매욕을 자극하기 위해 사용된 과도한 색조를 보다 강조해 냄으로써 팝아트적 표현 기법을 충실히 재현하면서 원초적 야생성을 강조하고 있다.
피터의 〈Emily Trim〉(2015)은 1994년 짐바브웨 소도시인 루와(Ruwa)에 위치한 Ariel Primary School에서 UFO를 목격했던 5살에서 12살 사이의 어린이들에게 헌사하는 작품이다. 작품에 묘사된 Emily의 아름답지만 여리고, 창백한 얼굴과 어딘가에 홀린듯한 시선은 그녀가 UFO와의 만남으로 인해 어떤 하나의 확고한 진실에 대한 감정이 상실된 것처럼 보인다. 피터는 이 작품에서 과장된 사실주의적 기법을 통해 통상적으로 여겨지는 인간유기체의 전우주적 우월감과 상치되는, 등장인물의 비현실적인 감각과 내적동요를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신디의 〈Broken Bones〉(2014)은 실제 사람의 두개골 표본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목탄으로 제작된 작품은 작가의 탁월한 테크닉과 결합하여 극단적으로 세밀하게 표현되었기에, 통상적으로 유사한 오브제에서 느껴지는 공포 또는 혐오감의 발로에서부터도 일견 자유로워 보인다.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듯한 해부학적 묘사를 통해 존재, 죽음, 시간 등의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유려하게 품어낸다.
윤석원의 〈David〉(2015)는 어떤 면에서 루이스 라울러(Louise Lawler, b. 1947) 식 접근법의 회화적 변용으로도 해석될 수 있음이 흥미롭다. 사진으로 촬영된 오래된 조각 작품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회화로 재현하는 그는, 대리석 질감이 사진화하면서 회색톤의 계조를 가지게 됨을 주목하였고, 이에 컬러가 거의 배제된 모노크롬 회화를 추구하여 왔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또는 즉흥적으로 캔버스에 산재되어 있는 선과 점, 불규칙한 표면의 돌출은 차용된 조각이 관통해온 시대적 환경과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적 장치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