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삶: 이재이, 막스 프리징거, 김세진, 한스 옵 더 베익, 마크 맨더스
갤러리바톤은 《The Secret Life(사적인 삶)》을 3월 9일부터 4월 9일까지 한남동 전시 공간에서 개최한다. 국내외 작가들의 영상 작업과 조각, 콜라주 작품이 서로 연대하여 독특하고 섬세한 미장센을 구축하는 이번 전시는, 마치 하나의 선집에 실린 여러 단편처럼 서로 다른 스토리 라인 안에서도 ‘사적인 삶’이 내포하는 함의를 참여 작가들의 고유한 내레이션을 빌어 친밀하게 내 보인다.
한 작가의 작품은 전시 등으로 ‘드러남’의 단계를 거치면서 그것이 가진 공적인 가치와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단계는 작가의 작품들을 비로소 비평의 대상이 되게 하고 미술사적 맥락에 따라 분류되는 과정을 제공한다. 한 작품의 지배적인 형상 또는 화풍은 특정 사조와 그룹에 편입되면서 ‘기존 양식의 있음 직한 파생’으로 인식되고, 그 사조와 그룹, 세대의 의식적 지향점의 테두리에서 논의되고 소비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동시에,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작품은 작가의 삶의 구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보이는 대로 재생한다는 위지윅(WYSIWYG)적 획일성은 아닐지라도, 작가 자신의 경험과 뿌리, 한 사물 또는 이벤트와의 조우에서 기질적으로 중시된 ‘제2성질’은 생산 또는 출력이기도 한 작품에겐 일종의 지문이자 이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며 전시를 보게 된다면, 각 작품이 단순히 재현의 결과물이 아닌 작가의 삶을 일부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창(window)의 기능 또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기는 방식이 아닌, 이미 생각에 잠긴 채 봉인된 듯한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는 체험 또한 이 전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이재이 작가의 〈Once Called Future〉(2019, 3-channel video installation with sound)는 영상 작업의 대표적인 특질인 현란함과 기민성, 주입적 태도를 한껏 내려놓고, 시적 내러티브의 감흥과 노스텔지아적 아스라함을 속삭이듯 전달하고 있다. 한 노인의 유년 시절의 연애담과 노년에 이르는 삶 속에서 깨달은 사적이고도 심오한 생각의 독백이 내내 흐르는 가운데, 과거가 상징했던 미래의 자화상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설정이 세턴 5호 로켓과 텍사스의 변두리에 방치되어 있는 Futuro House의 사진과 교차 편집되어 상영된다. “꽃은 주고 싶게끔 만드는 어떤 감정이 지속되는 한, 계속해서 꽃을 주고......, 또 꽃을 주는 것과 같아요”라는 노인의 독백에서, 화려하지 않지만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편린들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김세진 작가의 〈Messenger(s)〉(2019, 2-channel 3D motion graphic video on each OLED & LED Monitor, stereo sound, LED lights)는 작가의 제16회 송은미술대상(2019) 수상전에서 초연되었던 작품이다. 1957년 발사된 소련의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우주로 보내진 ‘라이카(Laika)’가 우주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극단적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3D 기법으로 제작된 영상과 함께 설치된 조명 기구와 사운드 장치는 모니터의 좌우를 가로지르며 반복 재생되는 라이카의 이미지와 함께 이미 반세기도 넘은 초창기 우주 개발 시대의 이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귀환 계획 없이 발사된 우주선 안에서의 라이카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듯한 눈빛과 표정으로 의연하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현장감 있게 묘사된 우주공간의 연출과 어우러져 그 운명과 삶을 잠시라도 짐작해 보도록 한다.
벨기에 태생의 현대 미술가인 한스 옵 더 베익(Hans Op de Beeck)의 〈Dog〉(2019, polyester, coating)은 실물 크기의 강아지가 바닥에 배를 맞대고 엎드려 쉬고 있는 형태의 조각이다. 몸을 감싸고 있는 실키 한 털의 윤곽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강아지는 지긋히 눈을 감고 있고, 평온한 순간의 묘사인듯 함에도 피곤한 기색 또한 함께 내비친다. 전시 공간의 바닥과 유사한 회색 톤으로 처리된 작품은 장소 특정적인 구성의 힘을 빌려 무색의 바닥이 가진 무덤덤한 분위기와 동조하며 마치 강아지의 긴 휴식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과 같은 기묘한 안온함을 준다. 삶이라는 복잡다단하고 결말이 있는 무대와 거기에 종속된 대상들이 경험하는 생의 무게와 그 사연들을 반추해온 작가의 그 간의 메시지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마크 맨더스(Mark Manders)의 구리 조각 작품인 〈Fragment of Forgetting〉(2019, patinated bronze, brass, wood)은 사람 얼굴 형태의 산화구리 조각상이다. 작품의 일부이기도 한 세밀하게 가공된 나무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조각상은 온화한 표정을 짐작할 수 있는 입술의 윗부분만 남겨진 채 외력에 의해 부식된 것과 같은 인상을 풍긴다. 구상 요소를 지닌 조각에서 존재하지 않는 부분을 회화 작품의 빈 공간과 동일시하지 않음은, 그 부분은 한번 채워졌거나 또는 상상의 영역에서 추론이 가능한 “가능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측면과 후면에서 수직 구조물의 존재감은 배가되는데, 전면이 부여하는 구상성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지고 영겁의 시간 동안 출토를 기다리던 청동기 유물의 형태와도 유사한 거친 모습을 드러낸다. 한 조각에 공존하는 즉물적 형상과 그 해체의 욕구는 고요한 조각상의 내면에 휘몰아치는 격정의 에너지감을 짐작게 한다.
독일의 설치미술가인 막스 프리징거(Max Frisinger)의 평면 설치 작품들은 그 외양의 모습을 본뜬 〈Volans〉(2015, polyethylen, wood, LED), 〈Cygnus〉(2015, polyethylen, wood, LED), 〈Leo〉(2015, polyesthylen, wood, LED)와 같은 우주 성운의 작품명을 가지고 있다. LED와 수명을 다해 헤진 망 등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에 기반한 작품들은, 세심하게 연출된 빛의 군집을 이루며 용도적 가치가 소멸된 공산품에도 작가의 의지에 따라 조형성이 창출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현대적 개념에서의 미술과 일상의 경계, 그 확장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함께 전시되는 〈H.D.N.R.I.B.I.R.〉(2016, post cards and painting magnets) 시리즈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술관의 주된 기념품이기도 한 엽서와 프린팅 마그네틱의 한 쌍으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Assemblage)는 각기 독립된 작품 이미지와 그 서사의 한 부분을 다른 작품의 이미지에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하며 화면에 즉각적인 생동감을 부여한다.